2019. 6. 20. 08:41ㆍContents/시사보도
MBC <실화 탐사대> 34화 리뷰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에는‘루도비코 요법’이라는 심리 치료법이 등장한다. 이것은 일종의 세뇌 요법으로, 악랄한 범죄자들이 잔인한 장면을 볼 때마다 고통을 느끼도록 학습시키는 것이다. 자신들이 벌인 행위가 얼마나 나쁜 행동인지 고통으로 체감하게 하는 것이다. 이건 결코 좋은 처벌법이 아니다. 사람을 강제로 붙잡아 억지로 학습시킨다는 점에서 범죄자들의 행위와 다를 바 없는 폭력 행위이며 범죄자의 자발적인 반성이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교정 행위가 아니다. 나는 강력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행위는 더더욱 옳지 않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난 5월 29일 방영된 <실화탐사대> ‘사라진 성 범죄자를 찾아서’ 편은 어쩌면 이 세상에는 ‘루도비코 요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무엇이 내 생각을 흔들었을까. 방송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어보고자 한다.
피해자 배려는 어디에
<실화탐사대>는 반성 없는 범죄자와 그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낱낱이 공개했다. 방송 내내 치를 떨던 패널들처럼 나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끔찍한 일을 벌이고도 자신은 잘못을 하지 않았으며, 피해자가 되레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범죄자들의 뻔뻔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만약 피해자라면 이 방송을 어떻게 볼까?’
<실화탐사대> 뿐만 아니라 실제 사건을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 전반이 고려했으면 하는 문제다. 피해 장면 cctv나 범죄자 인터뷰는 시청자들이 당시의 피해자처럼 공포감을 느끼고 분노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자료는 방송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인터넷에서 클립이나 스크린샷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피해자들이 피해 상황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의도치 않은 2차 가해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극적인 장면 없이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cctv나 블랙박스 영상이 방송에 노출되기 시작한 후로 시청자들의 공감의 역치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콘텐츠가 양산될수록 중심을 잡는 것 또한 좋은 방송의 의무다. 피해 사실과 범죄자 현황은 연출과 재연, 인용 등으로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자극적인 화면 없이도 사회의 민감도를 높여야 하는 것이 방송의 과제다. 피해자 또한 시청자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주변인 반응'의 공익성
<실화탐사대>는 지난 4월, 국내 최초로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방송에 의하면 현직 경찰들은 해당 방송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시청자들 또한 조두순 얼굴 공개를 반겼다. 재범 우려가 높은 아동 성범죄자의 신원은 국민의 ‘알 권리’에 해당한다는 판단이 대부분이었다. 여기까지는 동의했다. 그러나 5월 29일 방송에서 조두순 아내의 육성 인터뷰를 담은 장면은 좀 의아했다. ‘이것이 우리 알 권리에 해당하나?’. 물론 가해자의 주변인들이 피해자에게 어떤 죄책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중요하다. 출소 이후 주변인들 또한 교정의 역할을 담당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악마성’을 보여주기만 한 점은 아쉽다. 방송은 성범죄자의 ‘관리’를 지적했다. 주변인 반응이 시청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공익성이 있어야 한다. 재교육은 범죄자뿐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필요하다거나, 주변인의 인식 변화 또한 범죄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 등으로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주변인들의 반응은 개인의 윤리성을 드러내는데 그치며 그저 시청자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흥미 요소에 불과할 뿐이다.
선정적 방송을 줄이는 법
<실화탐사대>의 기획의도 중 하나는'우리 사이의 공감을 넓히는 것'이다. 선정적인 화면으로 감정선을 건드는 것만이 공감을 유도하지는 않는다. <실화탐사대>가 잘하는 대로 이웃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섬세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기만 해도 시청자는 함께 가슴 아파하고 분노할 수 있다.
자극적인 방송을 줄이는 또다른 방법은 국가가 해야할 일을 방송이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실화탐사대>는 지난 4월 ‘범죄자를 찾아서 1탄’의 방영 이후 한달의 여유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 동안 ‘성범죄자 e-알리미 서비스’는 보완되지 않았고, 성범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행동을 번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가 관리가 부재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인근 주민들은 고스란히 범죄의 위험에 노출됐을 것이다. 방송이 ‘세게’ 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국민들이 분개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강력 범죄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예방과 사후 처리에 신중을 기하면 된다. 이번 방송이 우리 치안 시스템을 제대로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디‘범죄자를 찾아서’ 3탄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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