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9. 17:05ㆍContents/교양
<시골주치의 프로젝트 왕진원정대> 리뷰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정말 아무 할 일 없는 주말인데 일찍 잠에서 깨어버린 날 말이다. 시계를 보고 ‘좀 더 자야지’하고 뒤척여도 잠이 도저히 오지 않는 그런 날. 서천군 할머니들을 만난 날도 그랬다.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할 일 없이 TV 채널만 돌리던 나는 화면 속의 맛깔스러운 밥상 앞에서 리모컨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이내, 머위 따는 금배 할머니의 사연을 듣게 됐다.
고단한 시골 여성의 삶
할머니는 평생을 발이 꺾인 채로 살았다. 스물셋 어린 나이에 시집와 낯선 농사일에 몸을 던졌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건지 몰라서’ ‘이 다리를 끌고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그렇게 고단한 삶을 견뎠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내고는 눈물까지 말랐다. 그는 그렇게 70년을 살았다. 평생 할머니를 괴롭히던 ‘꺾인 발목’. 할머니는 어릴 때 불구가 된 줄만 알았다. 할머니의 발목은 단순한 탈골이었다. 제때 치료를 했으면 남들처럼 걷고 뛸 수 있었던 것이다. 아픈 발목을 안고 열심히 70년을 달려온 할머니. 긴 세월만큼 그는 무뎌지고 단단해졌다. 자식들을 다 키워서 이제는 행복하다는 그는 자신을 모질게 구박했다는 괴팍한 시어머니에게 되레 ‘죄송하다’고 말한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왕진원정대> 주인공들의 삶은 좀 더 고단하다. 낯선 곳에 시집와 일만 하고, 자기 몸을 버려가며 일평생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허리가 굽을 수밖에 없었던 <왕진원정대> 주인공들의 삶이다. 이들의 아픈 몸은 불의의 사고로, 운이 안 좋아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희생’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시절이 만들어 낸 아픔이다. 왕진원정대>가 보듬는 것은 이들의 아픈 허리뿐만이 아니라 당시 여성들의 삶 자체다.
가만히 들어주기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질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할머니들이 허심탄회하게 당신 이야기를 풀어놓는 걸 보면 내 마음까지 편해진다. 코미디언 강성범, 이영은 아나운서, 도은식 원장. 의 진행자 세 명은 ‘경청’의 달인들이다. 강성범 씨와 이영은 아나운서의 리액션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진다. 이들은 과하지 않다. 누군가가 고단하게 살아온 삶을 함부로 칭송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가만히 듣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는 걸 이들은 알고 있다. 전문가 패널인 도은식 원장은 정말 친절한 의사다. ‘정말 아프셨겠어요.’ 환자에게 의사의 이 한마디는 굉장한 위로다. 그는 어르신들의 귀여운 엄살도 넉살 좋게 받아치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어쩌면 어르신들에게 필요했던 건 이런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고되게 사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이들에게도 가끔 무뎌지지 않는 나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은 마음을 돌볼 시간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오늘은 오늘의 할 일이 있고 내일은 내일의 일이 있으니 말이다. ‘나도 아프고, 나도 힘들다’.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 방치된 허리만큼 이들의 마음도 오랫동안 곪아왔을 터다. <왕진원정대>는 어르신들의 마음에도 간단한 치료약을 처방한다. 가만히 들어줌으로써, ‘고생 많으셨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왕진원정대> 가 더 많은 곳을 찾길 바라며
주말 아침에 일찍 눈을 뜨면 괜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천군 할머니들을 만난 그날만큼은 일찍 잠을 깬 것이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마음이 따뜻하게 덥혀진 채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오전 6시 10분이라는 왕진원정대>의 이른 방영 시간이 아쉽기는 하다. 일요일 아침을 따뜻하게 시작하는 것도 좋지만, 일요일 아침 새벽녘부터 TV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 소개한 대로 농∙어촌 인구의 80%가 노인들이지만 이들을 치료할 의료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다. ‘의료 취약 시설’에 대한 문제의식을 좀 더 알리기 위해서라도 방영 시간이 조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단한 세월을 보낸 이들에게 의 위로가 더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마음에도 허리가 있을까. 참고 견디느라 휘어진 마음이 가끔씩 욱신거리지는 않을까. <왕진원정대>의 위로가 굽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시골 주치의 프로젝트 왕진원정대> 다시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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