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4. 08:58ㆍContents/시사보도
<PD 수첩 리뷰>
필리핀 앙헬레스에 한 한국인 부부가 살았다.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었다. 너무 올곧아서 주변 사람들이‘얄밉다’고 할 정도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남편은 아내와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회사에서 집을 들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남편은 집 앞에서 이름 모를 괴한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아내는 한국 영사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홀로 남편을 뒤쫓는다.
쓸쓸한 고군분투가 이어지던 몇 달 후, 아내에게 들려온 것은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남편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필리핀 현지 경찰이었다.
지난 17일, PD수첩은 방송을 통해 최경진 씨의 억울한 사연을 전했다. 지익주 씨는 필리핀 현지 경찰의‘설계’에 휘말려 납치된 뒤 고문을 받다 죽었다. 그러나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이 범죄만이 아니다. 방송은 필리핀 현지의 범죄를 고발함과 동시에 우리나라가 해외 교민을 얼마나 소홀히 보호하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최경진 씨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필요할 때 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로부터‘암 것도 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온 것이다. 한국 영사관도 교민을 위한 치안 경찰 코리안데스크도 경진 씨를 돕지 않았다. 이들의 답변이 가관이다. ‘법적으로 손 쓸 방법이 없다’ 거나 ‘바빠서 안된다’는 식이다.
PD수첩이 또다시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했다. 방송은 최경진 씨가 남편을 애타게 찾았던 과정을 따라간다. 누가 그를 데려가서, 어떤 고통을 안겼는지 추적한다. 경찰을 대신해 CCTV를 분석하고, CCTV 속 범인의 정체를 우리에게 알렸다. 그러나 경진 씨가 상대하는 것은 개인이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존재다. 필리핀의 한국인 표적 범죄는 일개 개인의 소행이 아니다. 필리핀 현지 경찰 고위직까지 가담하는 설계형 범죄에 해당한다. 이른바 셋업(set-up) 범죄다. 당연히 경진 씨가 이기기 힘든 싸움이다. 필리핀 언론이 사건을 보도하자 수사가 진행되는 듯했지만 결국 주력 용의자는 석방된다. 경진 씨와 교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최경진 씨의 사연에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 PD수첩은 이번 방송을 통해 범인의 얼굴을 완전히 공개했다. 그들의 뻔뻔한 발언을 가감 없이 내보냈다.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용의자를 우리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러나 사건의 결말은, 방송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언론은 시청자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지만 한 국가를 상대로 한 싸움을 완전히 해결할만한 힘은 없다. 이것은 지익주 씨의 사연이 필리핀 현지 언론에서도 심각하게 다뤄졌지만 필리핀 경찰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몇 년 전에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국인 표적 범죄가 있었다. 김규열 선장은 2009년, 필리핀 경찰에 의해 마약 운반 누명을 쓰고 현지 감옥에 갇힌다. 그는 한국 영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다. 그때도 이런 그의 소식을 한국에 알린 것은 언론이었다. 외교부는 언론과 국민의 요청에 잠시 응답하는 듯했다. 김 선장은 보석금을 내고 잠시 풀려나지만 결국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우리가 끝까지 관심 가지지 않고 국가가 움직이지 않은 결과다. 최경진 씨와 교민들은 도움을 호소한다. 현지 경찰들이 사건을 묻기 위해 이들에게 어떤 짓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외교부는'최선을 다했다'는 형식적인 답변만 내놓는다. 지익주 씨 사건의 후속 방송이 필요한 이유다. 방송이 잠시 지익주 씨 사연에 관심을 모을 수 있지만, 더 큰 이슈가 생기고 나면 이 또한 금방 사라질 것이다. 필리핀 경찰의 셋업 범죄에 휘말린 것이 지익주 씨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의 피해를 모아'셋업 범죄 특집 편'을 내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한 명의 사건으로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외교부를 움직일 방법이 필요하다. 이대로 지익주 씨의 사건이 잊힌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필리핀 교민들을 여전히 위험에 노출시키게 되는 것이다.
최경진 씨는 묻는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일이 있어야 이 나라는 움직일까요?”
뒤이어 그는 말한다.
“이렇게 큰 사건에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한국 사람 정말‘마사랍’이에요.”
마사랍은‘맛있다’는 의미다. 한국 사람 맛있다. 만만한 한국 사람을 노리면 돈이든 뭐든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의 조직적이고 악랄한 범죄 앞에서 한국인이 얼마나 나약한 존잰지 보여주는 말이다. ‘건드려도 상관없는’ 한국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악인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국가는 언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인가. 나 또한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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