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4. 14:51ㆍContents/드라마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면 하나. 초등학생 시절, 연극에 관심이 많으셨던 담임선생님께서 시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연극단 오디션에 와보라고 하셨다. 처음엔 호기심에 참가했는데, 대본 속 여자주인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오디션이 끝나고 선생님께서는 네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며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런데 캐스팅 결과를 듣고 나는 한참동안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내 역할은 주인공도 아닌 것도 모자라, 주인공들을 따라다니며 문제를 해결하는 천방지축 ‘도깨비’였다. (도깨비라니….)
장면 둘. 대학교에 와서도 연극과 인연이 닿았는데, 당시 리메이크했던 작품은 <렌트>라는 작품으로 에이즈, 동성애자 등 다양한 사회 취약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나는 ‘모린’이라는 당찬 캐릭터를 맡았으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배역을 논의하던 선배들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남자 배우가 한 명 모자라서 여성인 내가 ‘엔젤’이라는 게이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엔젤은 에이즈로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캐릭터였다.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를 보는 내내 여고생 은단오(김혜윤)에게 격한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런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늘 주인공 근처를 서성거리는 엑스트라였다. 온몸을 던져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거나 애처롭게 죽어버리는 역할이 내게 제격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만화 속 캐릭터인 것도 모자라 심지어 엑스트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소리를 지르던 은단오의 모습은 과거의 나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극히 소수이고 엑스트라가 훨씬 더 많은 법. 대부분의 사람은 엑스트라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주인공에 과도한 몰입을 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이 없으므로….
사실 나는 순정 학원 물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부잣집 외동딸이자 날 때부터 약한 심장을 가진 은단오와 그 친구들의 소개로 진행되는 순정 로맨스다운 시작에 ‘이거 보지 말까’하고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연속해서 6회차까지 모두 볼 수 있었던 건 김혜윤의 맛깔스러운 연기 덕분이었다. 김혜윤은 단오가 주인공들의 사랑놀이를 위한 장치일 뿐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감정변화를 실감 나게 잘 보여주었다. 스테이지 안의 대사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치고 나서 울분을 토하며 작가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거나, 작가가 만들어 놓은 상항을 바꾸려고 난데없이 조각상을 깨부숴 버리는 등 참 신명 나는 반항행위들을 펼친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쾌감이 밀려오기까지 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의 일상도 배역이 정해진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어하루>의 시나리오가 신선한 것도 생각을 비틀어 현실과 만화 사이의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학생이라면, 학급 내에서 성적, 인기 등에 따라 정해지는 나의 위치가 있고 거기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직장인도 다를 바 없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오라는 회의에 참석하고, 직급에 맞게 머리를 조아리고 눈치를 봐야 한다. 일이 힘들어도, 태생에 맞지 않는 공부일지라도 우리는 돈을 벌고 입시지옥에서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갇혀 있다. 이렇게 정해진 배역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어떤 사람들은 13번(로운) 같이 얼굴도 이름도 없이 사회의 배경화면으로 존재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역할이 없다고 느끼고, 일상이 무기력한 이들은 13번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사실에 적응되면, 모든 면에서 스스로 배경화면을 자처하게 된다. 또 그게 편하다는 확신마저 든다. 실제 나는 도깨비 역할을 할 당시 밥을 먹을 때도 주인공 역할의 친구가 아니라 나무1, 곰1과 옆에 앉는 것이 내 처지(?)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무1과 곰1을 맡았던 친구들이 나와 개그코드가 워낙 잘 맞았던 탓도 있지만). 게이 역할을 맡았을 때도 주인공들의 장면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조연 배우들과 매번 숨죽이며 대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내 배역이 나의 진짜 모습마저 가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엑스트라도 억울한데, 일상까지 ‘노잼’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내 배역을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깨비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덕분에 지역 방송 전파를 타게 되었고 엔젤은 상대역이 죽는 것으로 각색되어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 모든 건 비록 배역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내 하루하루만큼은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나름의 철학(?)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제목이 ‘어쩌다 발견한’ 하루인 이유도 그런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닐까? 13번의 이름이 ‘하루’가 되는 것도? 여고생 단오가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사랑을 이뤄냈으면 좋겠다. 또 단오가 얼마나 재밌는 하루를 살아갈 지 무척 기대된다. 열과 성을 다해 내 역할의 장점을 찾아내 보는 것. 엑스트라의 삶일지라도 내 하루는 소중한 것. 그리고 결말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어하루>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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