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화해하지 못한 이여자와 이남자

2019. 9. 1. 20:26Contents/교양

MBC스페셜 <이남자, 분노하다> 리뷰

 

나는 페미니스트다. 일부 사람들에 의하면 나는 ‘메갈’이기도 하다. 이 같은 평가는 내가 매일같이 일어나는 남성의 여성살해 범죄에 분노했을 때, 여성의 유리 천창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을 때 돌아온 것이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 말하면 ‘페미’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회를 몸소 실감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이남자’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지금껏 마이너리티로 존재해 온 여성운동이 어쩌다 이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지게 된 걸까. 이들을 이해하면 내가 더 이상 나의 남성 친구들, 남성 형제와 언쟁하지 않아도 될까. 나름의 기대를 했다. 안타깝게도 ‘이남자’ 시리즈를 보며 여성과 남성이 화해를 할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프로그램이 보여준 남녀 간의 감정의 골은 깊었지만 그 해결은 미미했다.

 

그는 ‘이남자’를 대표하지 않는다

프로그램 시작부터 반페미니즘 유튜버가 등장한다. 그는 여성들이 속옷을 입지 않고 시위하는 것이 미친 짓이며, 여자들이 ‘성별을 마치 특권인 것처럼 휘두른다’고 주장한다. 그는 뒤에 자신이 페미니즘 콘텐츠를 통해 주목 받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이 유튜버의 반페미니즘 영상 대부분은 혐오 발언이다. 페미니스트 여성을 돼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쑤며 논리보다는 조롱을 앞세우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이같은 인물이 어떻게 ‘20대 남자의 대표’가 됐는지 의문이다. 마찬가지로 20대 남성 중 한 명으로 등장한 출연자 중 한 명은 SNS에서 여성 관련 기사마다 무분별한 혐오 댓글을 달고 다니던 사람이다. SNS로 뉴스를 접하는 이들이라면 댓글창에서 그의 이름을 한 번쯤 본적이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무엇에 분노하는지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이들이 방송에서 20대 남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방송이 반페미니즘의 무논리를 드러내고 여성들의 분노를 이끌고자 했다면 아주 성공적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들이 20대 남자로 대표되는 것이다. 이들이 대표화 될 경우 페미니즘을지지하는 사람들에게 20대 남성은 논리 없이 혐오 발언을 일삼는 적대적인 집단이 될 뿐이다.더군다나 방송은 중반부에서 ‘페미니즘의 극단성’을 지적하는 청년들의 인터뷰를 실었다. 페미니즘의 극단성을 지적하면서 혐오발언을 일삼는 반페미니즘 유튜버를 노출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화해보다는 갈등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방송이 출연자 선정과 그들의 발언 노출에 좀더 신중했어야 하는 이유다. ‘남성이 여성에게 가지는 혐오가 좀 더 광범위하다’는 통찰 또한 남성 출연자의 입에서 나왔다. 지금의 갈등에 대해 깊에 생각하고 나름의 판단을 내린 20대 남성이 분명 존재한다. 20대 남성의 ‘반페미’ 정서를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페미니스트만큼이나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좀 더 많은 분량이 할당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갈등을 메우지 못하는 짧은 대화 그리고 성급한 마무리

방송에 가장 기대했던 것은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사이의 대화다. 각자의 생각이 뚜렷한 이들이 마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방송은 이를 정당 청년대변인들 간의 대화를 통해 보여줬다. 물론 둘 사이 생각의 간극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다만 서로 물고만 뜯는 게 대부분인 젠더 갈등 문제에 대해서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거나 ‘이해 한다’는 말들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실마리가 보였다는 점은 기쁘다. 방송 후반부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 대화의 실마리를 더욱 증폭시킨다. 페미니즘을 한다는 이유로 평이 안 좋았던 동기를 회상하는 남성 출연자. 여자 형제와 자신이 느끼는 일상의 공포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는 남성 출연자. 그리고 여러 세대에 끼여 있는 20대 남성을 이해하는 여성 출연자의 인터뷰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게 작은 공감이라도 한다면 서로에게 불쾌함을 갖지 않고서라도 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페미니즘이 남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남성 페미니스트의 의견 또한 흥미로웠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들의 등장은 앞서 ‘페미니즘이 싫다’ 강력하게 말하는 남성들에 비해 임팩트나 분량이 적어 방송 초반부의 불쾌감을 씻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개인별 인터뷰 뿐 아니라 이들 간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갈등 해결의 씨앗을 찾았다면 <이 남자, 분노하다>가 더 많은 청춘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해당 방송은 결국 여성과 남성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여성이자 페미니스트인 나는 방송에 불쾌감을 느꼈고, 남성들은 시청자 게시판에서 ‘페미니즘을 너무 착하게 다뤘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분노하다>의 다음 편인 <피 땀 눈물> 편이 갈등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청년 보편이 가진 문제를 ‘20대 남자’의 고생인 것마냥 제목을 붙인 것이 불만이고, 남성들은 ‘이남자 다루겠다고 해놓고 여자 문제를 왜 끼워넣냐’하는 불만을 털어놓는다. 맥락을 잃고 노후와 연금문제로 튀는 결말은 ‘제작진조차 청년 간 젠더 갈등의 해결책을 찾기 어려웠구나’하고 추측하게 만든다. 젠더 갈등은 지속될 것이며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문제를 더 깊게 분석하고 더 현명한 방안을 내놓는 것이 다큐멘터리와 방송의 의무다. ‘이남자’ 시리즈가 젠더 갈등 특집의 마지막이 아니길 기대하는 이유다. <분노하다> 편이 보여준 갈등 해결의 불씨를 화해의 장으로 키우는 MBC 스페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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