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까?

2019. 6. 11. 15:29Contents/드라마

나는 안판석 감독의 작품을 늘 끝까지 보지 못했다. 잘 보다가도 어느 순간 보고 싶지 않았다.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모두 그랬다. <봄밤>이 시작하기 전,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넷플릭스를 통해 이어 봤다. 내가 지금껏 안판석 감독의 작품을 끝까지 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힘들어서였다.

나는 보통 드라마를 볼 때 크게 감정 이입하는 편이 아니다. 인물이 힘들 때 힘들겠구나’, 아플 때 아프겠구나정도는 할지언정 내가 같이 힘들고 아프지 않았다. 내가 설레기는 몇 번 했지만. 안판석 감독은 시청자가 바라만 보고 있게 두지 않는다. 비슷한 경험이 있든 없든 적극적으로 시청자를 극 안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시청자가 마음 졸이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봄밤>도 마찬가지다. 정인(한지민 분)과 지호(정해인 분)의 사랑을 보는데 내가 벌써 힘들다. 이번 드라마는 과연 끝까지 볼 수 있을까?

 


너무 아픈 사랑

안판석 감독 작품의 사랑을 통틀어 말하자면 금지된 사랑’, ‘몰래 하는 사랑이다. <밀회>에서 혜원(김희애 분)-선재(유아인 분)가 그랬고,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봄(고아성 분)-인상(이준 분)이 그랬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진아(손예진 분)-준희(정해인 분)가 그랬다. 다들 환영받지 못하는 사랑을 했고, 그래서 힘들었다.

<봄밤>의 정인과 지호 또한 마찬가지다. 둘의 사랑 사이에는 정인의 오랜 연인 기석(김준한 분)이 있고, 지호의 아들 은우(하이안 분)가 있다. 단지 서로 끌렸을 뿐인데 둘의 마음은 잘못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 아픈 사랑은 시청자를 힘들게 만든다. 정인이 느끼는 죄책감만큼, 지호가 망설이는 만큼, 시청자도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이 잘못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 다른 로맨스 드라마를 볼 때와는 다른 감정을 느낀다. 전에는 얼른 고백해’, ‘얼른 저 사람을 잡아’, ‘얼른 서로의 마음을 알았으면.’ 하고 바랐다면, <봄밤>을 보면서는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이래도 되나’, ‘정말 그렇게 하는 건가하고 걱정한다. 둘이 앞으로 걷게 될 가시밭길이 이미 다 보이니 말이다.

 

 

사랑 말고 성장

아픈 사랑의 와중에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주인공의 성장이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자기 삶의 방식을 주인공은 사랑만큼이나 힘들게 바꾼다. <밀회>에서 혜원은 우아한 노비로 사는 것을 그만두었고,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봄과 인상은 아버지와 맞서 싸웠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진아는 사내 성희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까지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인생은 갑자기 찾아온 사랑 앞에 그 민낯을 드러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그렇게 그들은 성장했다.

<봄밤> 또한 마찬가지다. 정인은 지호를 만난 뒤 도서관에서 자신의 능력을 더 잘 발휘했고, 지호는 정인을 만난 뒤 아들 은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삶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는데, 더 나은 삶이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게 됐다.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을 거부하게 됐다.

정인과 지호뿐만이 아니다. 서인(임성언 분)은 가정폭력, 잘못된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새 삶을 찾기 위해 준비하고 있고, 재인(주민경 분)은 언니들과는 다른 사랑을 꿈꾸며 당차게 나아가고, 형선(길해연 분)은 글쓰기 특강을 듣는다. 다른 누구의 삶도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그들은 움직인다.

 

 

사랑하고 있습니까?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랑의 아름다움만 노래하지 않는다.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 계기로서의 사랑, 그리고 그를 통한 성장을 말한다. 가치관을, 생각을,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강력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은 아픈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저 사랑하면 되는 편한 사랑은 달콤함밖에 주지 못할 테니까.

사랑으로 시작된 성장의 종착역은 다시 사랑이다. 행복한 삶의 기준, 그것이 사랑이다. 끊임없이 사랑 없는 삶을 택하지 말기를 충고한다.

 

“제 핑계 대지 마시구요.

선생님 인생이나 생각하세요.

요즘 평균 수명 길어져서 100살도 넘게 산다는데,

그러다 정말 재수 없으면 남은 60년 사랑 없이 사셔야 돼요.

그거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시든가요.”

_<밀회> 선재의 대사

 

<봄밤>에서 정인과 지호의 사랑은 부모님과 선배, 오래된 연인을 배신하는 행위다.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두 사람은 죄인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두 사람이 가야 할 길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흔들림을 통해 둘은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될 것이다.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죄인이 되더라도, 조금 이기적일지라도.

 


 

사랑이 모든 일의 정답이라는 식의 드라마는 지금껏 많았다. 나는 그런 드라마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운명적인 사랑을 아직 해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봄밤>은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만약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그건 사랑일 거라고. 그 사랑을 반드시 잡으라고. 거기에 당신의 행복이 있다고.

사람에 치이고 상황에 치이는 요즘 사람들에게 사랑은 어쩌면 뒷전으로 미뤄둔 것, 이미 포기한 것일지 모른다. 내가 사랑이 모든 일의 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어떤 것으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봄밤>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사랑을 보여준다. 현실의 사랑을, 현실의 변화를. 그리고 꿈꾸게 한다. 나의 사랑을, 나의 행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