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슬’이라는 페르소나

2020. 1. 1. 21:47Contents/예능


김태호 PD와 유재석의 도전이 다시 성공했다. 지난 7일의 시청률이 무려 8.5%를 기록하며 대한민국을 강타한 유산슬 신드롬에 진정 불을 당긴 것이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시작을 알린 것이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는 무작정 카메라 두대를 맡기고 시작한 브이로그식 ‘릴레이 카메라’가 편성된지 6개월만에 확인할 수 있는 값진 성과이자, 김태호와 유재석의 조합은 통한다는 또 다른 증명이기도 했다.

 

유산슬은 유재석의 또 다른 페르소나다. 페르소나는 가면, 인격 혹은 타인에게 파악되는 자아를 통칭하는 용어다. 김태호 PD는 소위 ‘부캐’ (부캐릭터)로 불리는 유재석의 또 다른 자아들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활용한다. 드러머로, 트로트 가수로, 중식 셰프의 보조로, 라면가게의 일일 사장으로 그 소구 방식은 정말 다양하다. 그리고 각각의 페르소나는 모두 다 상이한 결을 가진다. 우스갯소리로 한 누리꾼은 ‘유재석 원톱 예능을 찍겠다던 무한도전 시절 김태호 PD의 야망이 ‘놀면 뭐하니?’를 통해 풀리고 있다’며 그 참신함을 칭찬하기도 했다.

 

각기 다른 페르소나 중 단연코 가장 큰 화제성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름아닌 ‘뽕포유’의 유산슬이다. MBC를 제외한 지상파에서도, 케이블에서도, 심지어는 크고 작은 오프라인 행사에서도 유산슬을 데려오고자 하는 섭외요청이 쇄도한다. 온라인에서의 화제성은 더욱 뜨겁다. ‘요즘 말 많은 신인가수.jpg (feat.유산슬)’, ‘신인가수 유산슬과 MBC의 수상한 관계.jpg’같은 유머성 게시글이 커뮤니티를 통해 퍼지는 것은 물론, ‘합정역 5번 출구’와 ‘사랑의 재개발’이 공식 음원으로 발매되며 음원차트에 실진입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한다. (트로트계의 거대 신인 송가인을 뛰어넘는 차트 진입순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최고의 화제력을 자랑하고 있는 유산슬, 과연 사람들이 유산슬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산슬의 성공과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김태호PD의 전략을 살펴보았다.

 


 

 

방송국만의 공식, ‘원소스 원유즈’를 깨다.

 

그간 방송국의 공식은 공고했다. 원소스 원유즈다. 이 말인즉슨 방송국은 하나의 콘텐츠를 만들어 이를 독점적으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예컨대 지상파간의 배타적인 독과점은 과거부터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MBC의 예능에 출연하는 예능인들이 자연스레 SBS와 KBS를 각각 S본부, K본부라고 부르는 사소한 화법에서부터 시작해, 만들어진 콘텐츠는 그 근원 플랫폼에서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시대는 변화하고 있다. 바야흐로 OSMU( One Source Multi Use ) 시대다. 제작진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 것 같다. 예능인 유재석과 유산슬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유재석이라는 예능인으로부터 다양한 캐릭터를 추출해 내 사용하는 것이다.

 

얼마 전 KBS의 아침마당에서 방영되는 신인 트로트 가수 대결에 유산슬이 등장했다. 어디 그뿐인가, SBS의 영재발굴단에 등장하는 트로트 영재 정동원 군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초대받아 등장한다. 유산슬은 말 그대로 지상파 3사를 휘어잡았다. 당장 10년전만해도 감히 생각도 못할 파격적인 시도였다. OSMU라는 키워드가 암묵적으로 흘러가던 몇십여년 간의 지상파 독과점 체계를 무너뜨렸다. 이제 시청자들에게 통하는 코드는 바로 다양한 플랫폼에서 어떠한 제약도 없이 누릴 수 있는 유산슬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엔 ‘확산’이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사실 그 중심엔 ‘확산’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사실 이번 ‘놀면 뭐하니’로부터 만들어낸 유재석의 페르소나는 비단 유산슬에 그치지 않는다. 김태호 PD는 유재석으로부터 굉장히 다양한 페르소나를 추출해낸다. (물론 요즘 고공행진을 걷고 있는 유산슬이 가장 대표적인 페르소나다.) 아무런 설명 없이 카메라를 쥐어주고 그를 촬영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캐릭터가 있노라면, 드럼스틱을 쥐어주고 쳐보라고 하고, 라면가게로 불러 사장님 대신 손님을 응대하고 라면을 끓이게 한다. 그 어떤 설명도 수반되지 않고 유재석이라는 인물을 할 수 있는데까지 확장시켜보는 것이다. 또한 앞서 짚어보았던 암묵적인 방송사들간의 배타적 콘텐츠 이용 또한 OSMU의 경향이 자아내는 방송사간 대통합 분위기로 미루어볼 때, 이 또한 ‘확산’이라는 키워드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실 요즘 TV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정해야한다. TV 시청률이라는 지표도 마냥 이전의 영광만큼 영예로운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 이면을 꿰뚫어 보고, 정확한 타겟팅과 기획이 필요하다. 김태호 PD의 전략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시청률을 넘어선 또 다른 지표, 바로 화제성이었다. 화제성을 잡게 되면 그 어떤 플랫폼에서든지 다방면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확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만 통하는 콘텐츠, MBC에서만 통하는 콘텐츠들은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화제성이 주요 지표가 되는 상황에서 편성표를 뛰어넘는 다양한 콘텐츠가 중요해진 것은 물론, 김태호는 바로 여기에 주목했으며, 유재석을 중심으로 하는 완벽한 확산 전략이, 시청자들에게, 대중들에게 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예능PD 출신의 김민식 MBC 드라마PD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20년 전에는 MBC 가요프로그램에서
컴백 무대를 가지면
타 방송사에는 몇 주간 못 나오던 적도 있다.
지상파 3사에서 같은 주에 컴백 무대를 갖는 게 가수의 인기를 드러내는 지표였다.
그래서 요즘 확인이 가능한
방송사 간 대통합 분위기는 지상파PD 입장에서슬프면서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지상파 독과점이 깨졌고,
예전처럼 각 사가 힘겨루기를 하기에는
모두 노쇠해졌다.
서로 견제하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슬프지만 견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이며, 콘텐츠 제작자들에겐 이러한 원 소스 멀티유즈를 필두로 한 확산의 플랫폼-콘텐츠 시대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확실히 타당한 이야기였다.

 

 


 

비인기 장르+비인기 조연으로 인기 공식을 재정립하다

 

또 하나 돋보이는 것은 바로 아이템 선정의 방식이다. 김태호 PD는 옛날 무한도전 시절부터 참신한 기획력으로 인정받아왔다. 그가, 그리고 그의 콘텐츠가 특별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재 선정’과 그 ‘소구 방식’의 다변화에 있다.

 

예컨대 이전의 무한도전 특집만 봐도 그렇다. ‘봅슬레이’, ‘조정’, ‘프로 레슬링’등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지상파 예능의 영역에 가져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스포츠, 그 중 특히 비인기 장르를 성공적으로 이식했던 경험이 있다. 비인기 장르이니 더욱 상투적인 접근은 지양해야 했다. 그래서 테마송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식 음원을 발매하고, 다양한 캠페인을 유도하며, 사회적 분위기에 맞는 메시지를 삽입해 상투적인 웃음과, 정 반대의 감동을 부여했다. 그의 이러한 공식은 ‘놀면 뭐하니?’에서도 활용되었고, 역시나 그 공식은 대중들에게 통했다.

 

이는 비단 장르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김태호 PD는 그간 조명받지 못했던 비인기 조연들을 직접 조명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산슬을 탄생시켰던 뽕포유였다. 박토벤으로 불리는 박현우 작곡가, 신으로 불리는 이건우 작사가, 그리고 정차르트로 불리는 정경천 편곡가에 이르기까지. 트로트 업계에선 물론 레전드로 불리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 작품들에 가려 인물들 자체를 재미있게 받아들이기는 사람은 없었다. 김태호는 창작의 영역에서만 존재했던 이들을 카메라 앞까지 끌어내어 오히려 재미있는 캐릭터를 부여한다. 15분이면 뭐든 된다며 뚝딱거리는 그들을 하나의 캐릭터로 포착해 편집해내는 그의 능력이 거쳐간다면 B급 콩트처럼 흘러가는 서사 쯤은 금방 만들 수 있다. 엉성함이 주는 아이러닉한 웃음이다. 그리고 김태호만이 재정립하는 인기 공식이다.

 


 

성장하는 유산슬, 유산슬의 무한도전

 

‘놀면 뭐하니?’의 정규 편성이 6개월을 막 넘어가는 현 시점에서, 이전에 썼던 글을 다시 되새겨 본다. 마지막 문단에 이런 말을 썼던 기억이 난다. 시청자들은 무한도전을 원하지만 무한도전을 원하지 않는다고. 이말인즉슨 그 속에 새겨져 있던 참신한 도전정신과 재미는 원하지만, 그 방식이 이전과 같은 진부한 레파토리이길 원치 않는다는 것. 지금에서 다시 이 문구를 되돌아보니 참 기분이 새롭다. 역시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김태호와 유재석은 아주 잘 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페르소나형 캐릭터가 더욱 다양해지길 바라본다. 기존에 영위했던 방송사만의 독점적 콘텐츠를 넘어서 다양한 소구 방식을 중심으로 더욱 한계 없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길, 콘텐츠 제작자들에겐 이것이 또 하나의 기회가 되고 시청자들에겐 제한없는 재미로 다가오길 바란다. 성장캐 유산슬이 그 시작이 되었으니 이제 또 다른 유산슬을 기다려 볼 때다. 또 다른 누군가의 무모한 도전을 기대한다.